수춘마을의 ‘구름천사’ 노의웅 화가의 역작 '금강산의 향연' 앞에서


수춘마을 연꽃 피는 수춘제와 양과동정, 그리고 노의웅 미술관
구름천사, 꽃천사, 사랑천사의 그리운 떠나온 고향사랑...
양과동정... 아픔도 슬픔도 절망도 위로해주는 구름천사 ‘저력‘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
2024년 01월 12일(금) 02:04
노의웅 교수의 역작인 [금강산의 향연] 350*700 캔버스에 유채 2000, 심혈을 쏟은 그의 작품을 설명하고 계신다.
[밝은뉴스] 수춘마을 구름천사 노의웅 미술관, 연꽃 피는 수춘제와 양과동정 지척

광주 남구 양과동에서 오랜 숙원이었던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미술관을 지난 2018년 개관한 노 교수는 개관 후 2019년 1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2년 반 동안이나 전국민을 힘들게 했던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한 팬데믹(pandemic) 상황에서도 구름천사를 통한 격려들을 쉬지 않았다.

개관 전부터 준비한 첫 번째 행사는 65년 전인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렸던 그림 300여점을 전시하는 작업이었다.
팔십 평생을 한 길만 달려 온 노 교수는 자신이 오랜 세월 그려온 3천 5백점의 ‘구름천사’를 비롯한 백두산 등의 다양한 그림들을 두 달에 한 번 꼴로 전시하며 방문객들을 위로해주었으며, 끝이 보이지 않던 전염병 퇴치를 위해 고생하던 사람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격려했다.

미술관 개관 전부터 준비한 첫 번째 행사는 65년 전인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렸던 그림 300여점을 전시하는 작업이었으며, 그가 떠나온 사라진 고향 마을 ‘와우골’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며 시간이 나는 데로 도시 재개발로 사라진 ‘잊혀진 고향’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노의웅 교수가 그려낸 태봉산
그와 나누던 경양 방죽과 태봉산, 그리고 말바우와 말무덤이 있는 서방... 평생을 살아왔던 잊혀지지 않을 와우골 이야기는 그의 손끝을 통해 잊혀진 당 시대의 모습을 재현해 내며 많은이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구름천사, 꽃천사, 사랑천사의 그리운 고향사랑...

노의웅 교수가 경향방죽과 태봉산, 말바우와 말무덤을 설명하고 있다.
노교수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무렵...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던 가족 같은 ‘와우골’ 고향 사람들을 수소문 해 찾아간 적이 있었다. 부쩍 노쇠해버린 마을 분들은 도시와 가까운 요양원에서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평생 그토록 쓰라린 슬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 든 적도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노교수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첫 마디는 ‘돌아가고 싶어요’였다. ‘나는 곧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니... 죽으면 살던 땅에 묻어줘요... 건축 보상비 같은 것은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단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 요양원을 갔다 왔지만 오래된 인연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쓴 약을 삼키듯 괴로웠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 길을 가버린 사람들이라며... 그의 입가에 비치던 슬픔은 뭐라 차마 표현할 수가 없다.


양과동의 노의웅 미술관, 아픔도 슬픔도 절망도 위로해주는 ‘저력‘

노의웅 교수의 아른거리는 눈빛... 그의 고향 '와우골'
20년 전이었던가?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으로 있던 노교수를 문화예술신문 기자신분으로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 노교수가 가지고 있던 힘과 에너지의 원천은 분명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정든 고향 땅을 떠나와 있다. 낯선 양과동에서 그는 다시금 거침없이 붓을 들어 ‘구름천사’를 그리고 있다.

그는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랑해야 할 많은 이유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루 10시간씩을 꼬박 작품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틈틈이 수춘마을과 지산마을, 황산마을을 걷는다고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 양과동은 노교수의 구름천사가 주는 위로가 필요한 곳이다. 앞서 소개했던 비운의 천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자신의 신념에 올곧았던 동암(東巖) 이발(李潑),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아픈 마음이 많이 많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곳, 포충사에서 수춘마을 양과동정이 지척에 있다. .
수춘마을 지척의 양과동정이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논의했다는 간원대였지만,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별서이기도 했다. 제봉(霽峰) 고경명이 누구였던가? 전장터에서 보여준 아낌없는 충성과 애국의 마음으로 받은 시호가 충렬(忠烈)이었던 그는 사마시(司馬試) 1위 합격, 임금 앞에서 치뤘던 성균관 시험 장원, 같은 해에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또다시 장원이 되는 등 당대에서는 견줄자가 쉽지 않았던 기재(奇才)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의병을 규합했다. 그가 오고 갔던 이 땅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살면서 어떻게 그가 의병 6,000명을 모아 펼쳤던 처절한 금산전투의 최후를 잊을 수 있겠는가? 몇 년 후 2차 진주성 방어 전투에서는 장남까지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잃는 등 삼부자(三父子)의 불꽃같이 타올랐던 충절과 애닮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의웅 교수 “흘러가면 또다시 오는 구름을 가지고 또 그려보고 만들어보고...”
그림을 보는 모두가 마음 속 작은 위안과 치유를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담았다는 ‘구름천사’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에게 깊은 위로를 준다.

노교수의 그림 속에는 항상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가득 담아져 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불현 듯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기에 그림을 보는 모두가 마음 속 작은 위안과 치유를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담았다는 ‘구름천사’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에게 깊은 위로를 준다.

노교수는 나에게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내 상상과 공상. 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만들어서 (구름이) 흘러가면 또다시 오는 구름을 가지고 또 그려보고 만들어보고..그 어렸을 때 구름을 보고 그렸던 것을 작품화 시키면서 본격적인 제 개성이 나타나게 된 겁니다”라고 자신의 구름천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흘러가면 필연코 다시 와주는 것들이 운명 같은 뜨거운 사랑이거나, 목숨을 걸만한 신비로운 모험 같은 것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기에 우리에게는 어쩌면 아픔도, 슬픔도, 절망도 다독여주고 위로해 줄 그, 혹은 그분의 하늘천사가 필요해지는 시절이다.
노의웅 교수의 역작인 [금강산의 향연] 350*700 캔버스에 유채 2000, 이 작품에 대해서 다음호에서 이야기할수 시간이 있으리라...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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