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뉴스] 숱하게 버려지는 시신을 먹기 위해 달려드는 여우들과 까마귀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광주 외곽의 한적한 양림산에 사람들은 출입을 꺼려할 수 밖에 없었다. 일명 ‘여우골’... 그런 곳에서 서서평의 꿈은 '꿈 너머 꿈'으로 조선 사회를 변화 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요안나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 (徐徐平)이 겪었을 당시 조선의 가을을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 광주 남구 양림동의 가을이 유독 빨갛다. 그리움이 지쳐 사무침이 되고, 사무침은 흐르고 흘러 빈 마음을 가득 채운다. 서서평이 있어 가능했을 일들... 그런 서평이 날마다 촛점을 맞추었던 기독교의 하나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인생의 좌표를 던져주고 계실까?
| 양국주 선교사와 양창삼 교수 두 형제가 발간한 서서평 관련 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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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선교사는 1년에 최소한 백 여일을 조랑말을 타거나 아니면 봇짐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 순회 전도를 떠났으며, 높은 문맹률과 고착화된 샤머니즘, 계급 사회의 암울한 이면을 뚫고 기꺼이 '조선의 벗'이 되주었다. 한센병자들을 위한 일평생의 헌신과 함께 과부 38명과 함께 지냈으며, 13명의 고아들을 자녀로 입양해 돌봤다. 영양실조에 걸려 5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그녀가 남긴 소유물은 낡은 담요 반장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이 전부였을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이렇듯 양림동의 가을은 서서평에게는 순회 전도의 개시를 의미했다. 가을과 겨울 농한기를 맞이한 시골 교회들을 두루두루 돌아다녔으며, 성경을 통한 한글의 보급과 함께 가능하다면 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든 변화 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 아름답고 찬란한 양림동, 선교사 가옥 앞의 가을이 비바람을 이겨내고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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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림리는 한적하고 외딴 곳이었다. 한여름에도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돌았다는 것이다. 주변엔 묘지가 천지였고, 곳곳에는 죽은 아이들의 풍장으로 나뭇가지에는 시신이 매달려 있을 정도였다.
어찌 그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풍장으로 버려진 시신을 먹기 위해 달려드는 여우들과 까마귀들 때문에만 힘들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의 숨막힐 정도의 갖은 횡포와 식민지 지배 야욕의 끝없은 확장으로 인한 고통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 그것 뿐이었겠는가...
| 서서평의 꿈은 꿈너머의 꿈으로 조선 사회를 변화 시키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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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증했으며, 1934년 7월 7일 광주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을 때 천 여명의 장례행렬에 ‘어머니 어머니!’라며 통곡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