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의웅 미술관은 지난 2020년~2021년 농촌내능나눔 활동을 통해 구름천사를 구례와 광주의 외곽지역에 벽화로 남기는 등 지역주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조선간호대학교 봉사단이 양과동 일대에서 총3회차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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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뉴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참화로 얼룩진 당쟁의 그늘 양과동정
노의웅 미술관 지척에 있는 양과동정(良苽洞亭)은 지역민들의 회합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정자였는데 조선시대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간원대(諫院臺) 역할까지 감당했던 유서가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조선 초 대학자였으며, 왜구토벌에 공이 컸던 김문발(金文發, 1359년~1418년), 광주향약좌목을 발의했고, 괘고정수(掛鼓亭樹)라는 남구 원산동 소재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왕버들을 심은이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거리명인 ‘필문대로’의 주인공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 1389~1454), 그리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정치가였던 서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의 정치적 숙적이었던 동인 이발(李潑, 1544년~1589년, 이선제의 5대손) 의 쓰라린 삶의 흔적들까지 만날 수 있는 곳이다.
|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 주변으로 내리는 구름천사의 꽃들은 양과동의 역사와 맞물려 주는 의미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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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정여립과 친분이 있거나 편지를 교환한 인사들까지 대거 체포되는 등 예나 지금이나 정치(政治)가 주는 술수와 비정함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수사 책임을 서인의 강경파였던 정철(鄭澈)이 맡으면서부터 옥사는 일파만파 확대되었고 1,000여명이 죽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얼룩졌다.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발생한 전대미문의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의미
| 구름천사의 위로라고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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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성시(謁聖試) 장원급제 후 이조정랑까지 오른 이발은 조광조의 기치를 이어받으며,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1584년 동인과 서인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의 거두로서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을 탄핵했고 파직시키고 말았다. 결국 서인들과의 끊임없는 알력과 정쟁의 서막이 열렸고, 그 역시 기축년 9월 부제학이라는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으며, 결국 한 달 후 기축옥사로 불행하게 생을 마무리했다.
기개와 강직함의 대명사였던 45세의 동암(東巖) 이발(李潑)은 82세의 어머니와 8살 난 아들, 그리고 아우 이길(李洁) 까지 모두 옥사하는 전대미문의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고, 전라도 출신들이 대거 처형되고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향(鄕)으로 지칭되버린 지나치게 왜곡된 사건으로 흘러갔다. 그 중심에 정철(鄭澈)과 이발(李潑)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비탄스러운 일이다.
| 양광동 수춘마을에서 바라보는 지난 가을의 들녁이다. 멀리 건지산 자락과 함께 지척에 양과동정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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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녁길 아득한데 새 날아가고/ 서울은 저기 저 서쪽 구름가에 있네/ 아침에 간밤 꿈을 기억해보니/ 모두가 어머니와 임금의 생각이라/
이발이 쓴 시(詩)속의 그 어머니는 뜻밖에도 옥사에 연루되어 불행하고 처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고, 이급(李汲), 이길(李洁) 형제들과 아들까지도 가차없이 목숨을 잃는 등 수난을 겪었다. 오매불망 임금이었던 선조는 인정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극단의 칼날을 휘둘렀던 것이다.
문제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전쟁 바로 직전에 기축옥사가 있었다는 것이며, 당시 임금과 조정 주류들은 매일처럼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오직 ‘서인 타도’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당리당략에만 혈안이 되어 다가올 전쟁의 파국을 예측하지 못했다. 결과는 가혹했다. 오늘날의 정치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양과동을 찾아준 봉사단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노의웅 교수, 미술관 하늘위로는 구름이 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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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천사의 작가 노의웅 교수의 구름천사가 주는 특별한 위로에 감사...
‘南道 정자기행’을 쓴 오인교 선생의 기행문(655)에 등장하는 ‘정자詩로 만난 인물-고의상(高儀相)’ 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인 1901년 양과동정중수기(良苽洞亭重修記)를 썼다는 내용과 함께 보수하고 지은 시가 현판으로 보존되어 남아 있다.
내용에는 우연찮게도 구름과 관련된 소절이 눈에 띈다. “흰 구름 돌아가니 높은 산세 고요하고(雲歸峰自在) / 메벼나락 기름지니 온 들녘이 푸르르네(秔膩野全靑)라 하였는데 당시 양과동을 흘러들던 구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나싶다.
이렇듯 구름천사의 작가 노의웅 교수의 양과동에서의 미술관 개관이 어쩌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나름 직감해본다.
| 농촌재능봉사활동에 앞서 노의웅 미술관을 방문한 봉사단 일행들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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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천역 지나 건지산(乾芝山) 아래 지산마을 지산재(芝山齋)는 신라말 비운의 천재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을 배향하는 곳으로 화려한 배롱나무꽃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지만 눈 온 뒤 하늘은 청명하고 구름은 높고 외롭다.
수춘마을 초입 양과동정은 조금 씁쓸해보일 정도이지만 오롯히 마을을 바라보며 충성심 강했던 동암(東巖) 이발(李潑)의 마지막처럼 처연하게 서있다. 멀지않은 원산동 마을의 괘고정수(掛鼓亭樹)는 기축옥사 당시 이선제의 5대손이었던 이발과 그의 일족이 죽음을 당하면서 말라 죽었지만 이후 다시 새 잎이 돋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 듯... 정치에서 희망이란 두글자를 빼면 힘들고 어려운 것처럼... 새 잎이 돋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 노의웅 미술관 가득 위로와 격려가 머물고 있다. / 노의웅 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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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서 내려주는 꽃들은 양과동을 위로하고 축복해주는 하늘이 주는 따스한 미소가 되어 아픔을 감싸준다. 마냥 흘러내렸을 이발의 눈물과 신선이 되어 인생을 마감한 최치원의 외롭고 힘들었을 인생 여정을 위로해주듯 포근하게 쏟아져 내린다.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