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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가장 먼저는 내 마음이 평화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가정과 소속한 사회와 국가가 더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평화를 얻는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어진 삶을 단순히 산다는 것을 떠나 소속한 집단이나 국가 모두가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믿는 자의 소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소망해보면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평화에 대한 직접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평화를 보통 ‘서늘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령 기니아의 푸타풀라족은 평화를 ‘서늘함’이라고 말한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해안으로부터 오는 습기 낀 바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평화를 서늘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동의해줄 것이 분명하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시들어가는 나무와 풀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듯이 ‘서늘한 상태’로 명명된 평화는 이 지역에 살며 불안과 근심에 쌓인 영혼에게는 한줄기 희망과 생기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벨리엔테 인디언들은 평화를 ‘고요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고, 과테말라의 캑치어로 ‘평화’는 고요한 선(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요동치는 마음 어디에도 평화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평화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일 수 있다. 세상의 악에 지배당하는 고요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 머리는 비둘기요 몸은 십자가라
너와 내가 하나 되어 그 십자가를 붙드니 끝없이 평평하구나
비둘기 날아와 십자가에 앉으니 온 세상이 다 한 식구다
비둘기여 평화의 새여
오늘도 훨훨 날아다오.
이것은 내가 도자기 서예에 비전을 품으며 심혈을 기울이던 어느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감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인들이 ‘불심(佛心)’이란 글씨를 좋아하고 늘 가까이에 걸어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도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글씨를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했었다.
그후 나는 꾸준하게 천번도 넘게 평화(平和)라는 글씨를 썼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작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 마음을 표현했다. ‘과연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수만번도 더 고민했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의 참화와 폭력에 무방비한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느날 나는 우연히도 한 식구의 단란한 밥상 공동체에서 평화를 발견했다. 화(和)를 쓰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섬에 있는 학교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아 온 작품이 바로 ‘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밥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엄마는 얘 하나에게 젖을 먹이며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비둘기 이야기를 해보자. 언제부터 비둘기는 평화의 새로 알려졌을까? 이것은 노아의 홍수 때 두 번째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 이야기(창8:11)에서 비롯됐다.
고대인들은 ‘비둘기는 담즙이 없어 미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평화의 새’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감람나무도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하나님이 평화의 축복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 우리 한반도에도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중동에도 평화의 바람이 순풍처럼 불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밝은뉴스 한밀 정문철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