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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한문자에 비해 한글서예는 ‘획’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자칫하면 조형미를 잃어버리기 쉽고 다양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기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나는 한글서예를 통한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과감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적어도 다양성을 가지고 특히, 복음적으로 표현’ 해보려는 노력을 쉬지 않았었다. ‘복음서예’라고 해야겠지만 결국은 한글이 그 중심에 있다. 어느 때는 십자가를 중심에 놓아보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기독교의 진수를 여덟 글자에 넣어 표현해보기도 했었다.
‘복음서예’는 한글의 세계화를 갈망하는 내 오랜 기도의 산물이었다. 깊은 영감 속에서 오랜 고뇌와 묵상을 통해 우러나온 것들이었다. 한 마디로 복음의 표현이었다. 생각해 볼수록 한국 미술 5천년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면면히 생명력을 유지해 온 우리의 전통예술로 세계적인 유산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예술이 그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예술도 삼국시대를 지나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에 이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색채가 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은 그 시대의 종교적 심성을 떠날 수가 없다. 자연 우리민족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불교적 근원을 예술 속에서도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많이 볼 수 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제 120년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는 어떠한가?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급성장을 경험한 한국의 기독교는 최근들어 정치적 이념의 문제 등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오랜 시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명처럼 간직해온 ‘복음서예’를 통한 한글의 세계화와 함께 복음 문화의 저변 확산을 통한 재도약의 의지 역시 다지고 싶다.
기독교문화의 활성화와 꾸준한 성장은 나만의 욕심일 수 있겠지만 될 수만 있다면 우리 민족 문화의 토양에 ‘복음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소신과 함께, 그렇게 해서 우리의 문화 속에 기독교의 생명이 흐르게 가꿔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문화 예술 속에 기독교의 숨결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남은 생애 최선을 다하고 싶다.
100년이 흐른 먼 훗날 우리는 무엇으로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문화의 활약과 영향력을 증거 할 수 있겠는가? 유럽의 중세 시대 이후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들 대부분이 기독교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 사상, 건축, 조각, 미술, 음악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고유한 작품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 감동을 주는 신앙의 힘은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내가 꿈꾸는 ‘복음서예’라는 목표 아래 작업한 작품들 속에서 언제까지 변질되지 않는 ‘경건’과 ‘신앙’을 얻고 싶다.
나는 목회자로 도자기 서예가로 10여년 이상 해외를 순회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략 20회에 이르는 큰 규모의 해외 전시회를 개최했었다. 서예가 복음이었고, 내가 명명한 복음서예는 내 삶의 목표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꿈꾼다. 복음서예라는 내 삶의 목표를 통해 한글의 세계화를 이루고 싶고, 한글의 세계화라는 명제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아름다운 도자기에 한글을 새기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밝은뉴스 한밀 정문철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