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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복음’의 의미
낙도(落島)에는 어느 곳보다 가난한 자들이 많았다. 내가 이 글을 썼던 당시는 더욱 심했다. 내가 평생을 마음에 품어 온 ‘복음’을 가난한 낙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도 낙도에 오래도록 살아본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역사적 전승자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복음’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 복음이며,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을 빼 버리면 복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말 것이다.
‘복음’과 ‘가난한 자들’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한 실체다. 전자가 마음이라면 후자는 몸이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또 가난한 자들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하부 구조의 조직 속성, 곧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근자에 들어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심각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부자들의 복음이라... 문제는 가난한 자도 부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다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복음’은 계급을 가리지 않는다. 양자에게 똑같이 유효하다는 ‘보편적 복음’ 임을 알아야 한다.
볼프강 슈테게만(W. Steggemann)은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희망과 자아 의식과 연대의 기초이며 표현이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에 관한 문제 의식이라고 했다.
복음의 수혜자인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오늘 이 가난한 낙도 혹은 이방의 낙도 같은 참혹한 나라의 국민들이 처한 현실을 보고도 그들을 외면해 버린다면, ‘복음’은 부자들만의 복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사실은 비참할 정도의 가난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뭔가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낙도는 이제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를 지났으며, 질병의 치료를 위한 의료 혜택의 사각지대를 벗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그들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파악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은 누군가 에게는 연구 대상이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해방을 위해 노력한다면 더더욱 우리는 그들과 연대해야 하며, 어떤 형태의 크고 작은 지지와 지원의 대열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웃의 가난한 형편에 대해 민감했었다.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모태로 이웃과 상생하며 부와 명예를 지켜온 경주 최씨 가문 등의 시대 정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날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빈곤(낙도의 빈곤)은 단순한 가난의 형태를 뛰어넘었다.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를 넘어 퀄리티가 높지만 보편화된 문화에 대한 향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이제 자선사업이나 일시적인 자매 결연 만으로는 효과적인 치유의 길을 열지 못한다. 오히려 가난을 연장하고 심화 시킬 수 있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혁신적인 새로운 처방이 요구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적 빈곤의 치유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야 정치’에 대한 고민은 더욱 심화된다.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자들의 희망은 무엇일까? 적어도 우리가 이 애매한 시대를 살면서 참다운 예수 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프락시스를 다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 프락시스[praxis] 사람이 의식적ㆍ능동적으로 이론이나 생각을 실행하는 일
밝은뉴스 한밀 정문철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