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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광주역 자리에 존재했었던 태봉산(胎峰山)은 신안동 121번지 일원에 있었으며, 작은산으로 해체 당시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으나 전해지고 있는 태봉산 풍광을 읊조린 시들를 보면 주변의 경양방죽과 논밭사이에 풍요로움마져 느낄 수 있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 정상까지는 불과 50m 정도였다.
19세기 초 문희탁은 ‘산도 강가도 아닌, 들녘 한가운데라...’ ‘꽃과 대나무 우거진 이곳에 새 집 마련하고 나니...’‘버들 숲 매운 안개 즐기며... ’라고 했으며, 문희탁의 아들 문상헌은 ‘...태봉산을 감싸니 맑은 기운 충만하고/ 샘물이 푸른 연못에 들어오니 연꽃향기 더욱 강하네...’라고 했다.
문치붕의 ‘태봉산시’에는 ‘태봉산 남쪽, 경양방죽 아래의 드넓은 들판/ 꽃들까지 활짝 피니 숨어살기에 좋네/ 맑은 연못에 물고기 뛰어오르자 연꽃은 움찔하고/ 외딴 마을 닭 울음소리에 대나무가 잠깐 그늘을 거두네 .../라고 했다.
세 편의 시에는 대나무, 버들숲, 연꽃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노의웅 교수는 1950~60년대의 서방국민학교(현 효동초교)가 바로 이곳 태봉산(胎峰山) 근처 들판에 자리했으며,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가 말바우에서부터 경양방죽, 그리고 태봉산이었다고 소회한다.
이괄의 난과 용성대군 이곤 태실, 그리고 금남공 정충신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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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를 죽이기 위해 파죽지세로 임진강을 건너 궁궐로 밀려드는 이괄의 군대를 쉽게 막을 수없었다. 반란을 피해 왕비와 함께 급하게 피난을 떠났으나, 피난 와중에 왕자 용성대군 이곤이 태어났다. 건강이 좋지 못한 왕자의 건강을 위해 광주 고을 복판에 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을 선택하여 금과 태를 계룡산으로부터 이장하여 함께 묻었다.
이괄은 한양땅에 입성하여 궁을 접수했고, 선조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내세워 이괄의 천하를 만들었다.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광주 출신 금남공 정충신 장군이다.
고려말 창궐하던 왜구 토벌 업적으로 크게 추앙받았던 경열공(景烈公) 정지(鄭地1347∼1391) 장군의 9대 후손이었던 그는 서대문밖 질마재에서 이괄의 반란군을 궤멸시켰고, 그때의 전과로 금남공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의 금남로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경열공 정지 장군 역시 광주 서구 경열로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대나무 우거진 태봉산과 연꽃향 드리워진 경양호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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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의웅 교수는 태봉산 부근 서방국민학교(현 효동초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북동에 있는 천주교까지 1시간30분을 걸어다니며 수녀님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집에까지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어두워졌는데 태봉산과 함께 사라진 경양방죽 뚝방길을 지날때쯤 무서움으로 인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며, 뚝방으로는 제법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경양방죽은 현 광주고와 계림초교, 예전 광주상고를 꼭지점으로 하는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최초의 면적은 대략 4만 6,000평에 이르는 거대한 인공 호수였다. 광주 중심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태봉산과 함께 사라지고 없다.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