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호수 ‘경양호’의 아름다움... 이제 되돌릴 수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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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광주의 호수 ‘경양호’의 아름다움... 이제 되돌릴 수 없다(2)


4만 6천평 크기의 경양호와 경호대·경호정 등 완전 사라져...
경양호 메운 경호대와 태봉산의 흙, 이젠 재생될 수 없는 그리움
경양호·태봉산 옆 흐르던 개천 ‘홍그랑 또랑’ 은 ‘물반 고기반’

1960년대 크기가 줄어든 경양방죽은 여름이면 보트장,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변하여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경양방죽과 태봉산 옆을 흐르는 개천을 ‘홍그랑 또랑’이라 불렀는데 붕어와 미꾸라지가 지천에 있어 모를 심을 때 주변 논에 물을 채우고 나면 바닥을 들어낸 방죽은 ‘물반 고기반’이 됐다고 노교수는 회상했다.
[밝은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주의 상징 ‘경양호’는 ‘김제 벽골제’에 비견

노의웅 교수는 태봉산 부근 서방국민학교(현 효동초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북동 천주교까지 1시간 30분 정도를 걸어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어두워진 경양방죽 뚝방길을 지나야 했다.

경양호는 1440년, 세종 22년 농공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전라감사였던 김방(金倣)이 축조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최고의 토목전문가였던 김방은 김제의 벽골제를 만든 지방관이었다. 조개보(옛 적십자병원 구기일대)에 취수구를 설치하여 무등산으로부터 물길을 만들어냈고, 현 불로동, 황금동, 충장로, 대인동, 계림동을 통과하는 도랑을 경양호까지 연결하는 대공사였다.

1960년대 크기가 줄어든 경양방죽은 여름이면 보트장,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변하여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경양방죽과 태봉산 옆을 흐르는 개천을 ‘홍그랑 또랑’이라 불렀는데 붕어와 미꾸라지가 지천에 있어 모를 심을 때 주변 논에 물을 채우고 나면 바닥을 들어낸 방죽은 ‘물반 고기반’이 됐다고 노교수는 회상했다.

경양방죽은 1968년 완전 매립 후 광주시청이 들어 섰으며, 2004년 광주광역시청이 다시 상무지구로 이전했고, 지금은 홈플러스 광주계림점이 들어서 있다.


경양호 4만 6천평은 1440년 축조된 인공호수
광주의 호수‘경양호’는 이제 되돌릴 수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최초 4만6천평 크기의 경양호와 경호대·경호정 등 완전 사라져... /나무위키 인용

경양호는 1935년, 일제강점기 전라남도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矢島杉造)에 의해 3/2가 매립됐으며, 태봉산의 경우 1939년 일제강점기에 나온 ‘광주시가지계획’ 수립 이후 1960년대 후반 들어서 완전 철거가 시행됐다.

1967년∼1969년까지 도로를 내면서 태봉산의 흙을 가져다가 경양방죽을 메우는 데 사용했는데 1950년대 늘어나는 광주의 인구로 인한 오염의 가속화로 저수지 기능은 상실되고 수질은 악화됐다. 이런 이유로 1966년 남아있던 경양방죽 매립을 결정했다고 한다. 2024년 지금은 태봉산 유래비만 남아있을뿐 경양호도 태봉산도 모두 사라졌다.

노의웅 교수는 이때 경양방죽 매립에 필요한 대부분의 흙은 광주상고에서 계림국민학교까지 이어졌던 규모가 제법 큰 흙산이었던 경호대의 토사로 메웠다고 말했다. 경호대는 경양방죽의 연꽃을 감상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경호정이란 정자까지 있었으나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나고 자란 ‘서방’에서 재개발로 사라져간 역사를 보는 아픈 단상
경양호와 태봉산, 말바우와 말무덤 등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 했다면 지금 광주관광의 이정표가 됐을 것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랜드마크로 부상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노교수와 나누는 경양방죽과 태봉산, 그리고 말바우와 말무덤이 있었던 당시 와우골... 그러니까 지금의 ‘서방’은 그가 평생을 살았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유년과 청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잊은적이 없는 지극한 향수(鄕愁)가 묻어나는 그리움 그 자체였던 곳들이다.

와우골에서 경양방죽을 끼고 광주상고 쪽을 오가던 노교수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태봉산과 경호대가 굉음을 내면서 시시각각 사라지는 아픈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고등학교 출퇴근길에 보여지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 자체가 서글픔이며 큰 아쉬움이라 했다.

경양호와 태봉산, 말바우와 말무덤 등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 했다면 지금 광주관광의 이정표가 됐을 것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랜드마크로 부상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노교수는 오랜 추억들을 되짚으며 그려놓은 태봉산과 경양방죽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그걸 지키지 못한 게 너무 가슴 아프다. 그리고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립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관개 용수로 사용됐으며, 풍경 또한 장대하고 잔잔한 호수였다
노교수는 오랜 추억들을 되짚으며 그려놓은 태봉산과 경양방죽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그걸 지키지 못한 게 너무 가슴 아프다. 그리고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립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학규(1770~1835)와 이곤수(1808~1888)는 관개 용수로 사용된 경양호의 풍경은 장대했고 잔잔한 호수였다는 내용을 남기고 있다. 방죽의 다른 이름은 거울 같은 호수라는 뜻을 가진 “경호(鏡湖)”였다.

이보다 앞선 1640년 광주목사(光州牧使) 신익전(申翊全 1645~1648)이 남긴 ‘척금당기(滌襟堂記)’에 “저수지에는 연꽃 수 만 송이가 심어져 있고... 둑 위의 교목 수천 그루는 折楊樓(공북루라고도 불렸던 누각)까지 곧바로 이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의 기록에는 ‘바람 없는 조용한 날이면 수면은 마치 큰 거울처럼 가만히 하늘을 비췄다’고 했으며, ‘거울이 귀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이는 ‘화룡승천’이란 풍수지리를 들어 광주(光州)는 불빛 곧 화(火)가 성하여 흉년이 찾아들면 농민을 괴롭히는 실정인데 물이 적어 불이 성할 수밖에 없다. 가끔 화재가 발생하면 불길을 끌 만한 큰 저수지가 없는 고을이라 하여 경양호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전남대학교 캠퍼스에 용지(龍池)를 만든 이유도 ‘화룡승천’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남아있는 방죽마져 없애면 광주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1969년 인공 호수를 만들게 된 것이다.
매년 심각한 물 부족을 경험한 바 있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 시대에 물의 필요성부분에 있어서 일정부분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강경구 기자 smile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