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성공은 순식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강성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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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정한 성공은 순식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강성열 교수]


광야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누구나 승리를 거둔 후에는 슬픔과 좌절의 시기 경험...
일시적 성공에 취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최선 다해야

[밝은뉴스] 호남신학대학교 강성열 교수

분열왕국 시대 초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철권 통치 아래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야웨 신앙이 바알 종교에 의해 압살 당하던 때였다. 따라서 그의 예언 활동은 당연히 바알 종교에 맞서 야웨 신앙을 되살리는 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예언 메시지가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비(또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 바알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임을 선언하였고(열왕기상 17:1), 갈멜산 대결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야웨야말로 유일한 참 신임을 입증하였다(열왕기상 18:1, 30-46). 야웨 신앙의 승리는 자연스럽게 가뭄의 해제와 풍성한 비의 허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갈멜산에서의 승리는 곧바로 바알 종교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알 종교에 근거한 아합과 이세벨의 철권통치는 여전히 계속된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머잖아 야웨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神政) 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다.

갈멜산 승리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보고하는 열왕기상 19장은 이처럼 승리를 거둔 후에 생겨난 상황의 반전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17-18장의 엘리야 대신에 절망과 좌절에 빠진 엘리야를 만나게 된다.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의기양양해 있던 엘리야가 왜 그토록 쉽게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된 것일까? 그 까닭은 아마도 엘리야가 하나님의 권능에 기초한 기적적인 승리에 너무 쉽게 도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외적인 승리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공의 결과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너무도 컸던 까닭에, 이세벨의 생명 위협에서 비롯된 상황의 반전은 그에게 큰 절망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그가 아합과 이세벨의 공포 정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다면 갈멜산에서의 승리에 그렇게 쉽게 도취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공이 그가 기대하듯이 그렇게 순식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그는 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늘 듣는 얘기이지만, 성공에서 오는 지나친 흥분은 억제하는 것이 좋다. 한 번의 성공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차분하게 또 다른 성공을 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은 갈멜산의 승리에 도취되었을 엘리야를 꺾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성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시적인 성공에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전진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그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무수한 성공을 거두셨지만, 한 번도 그러한 성공들에 도취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는 큰 성공을 거둘 때마다 조용히 사람들을 피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자 했다(마가복음 6:45-46).

열왕기상 19장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누구나 승리를 거둔 후에는 슬픔과 좌절의 시기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리의 때가 아니라 좌절과 실망의 때에 깊고도 새로운 교훈을 배운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이세벨의 분노에 직면한 엘리야는 힘도 용기도 잃고 말았다. 기대에 대한 좌절, 자신의 사명이 실패했다는 느낌, 장기간의 굶주림, 오랜 여행으로 인한 신체적인 피로 등으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야의 고적한 곳에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는 그 분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피신한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곳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광야의 시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요, 동시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유랑이 그러하였으며,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마태복음 4:1-2)이 그러했다. 바울의 아라비아 광야 수행도 마찬가지이다(갈라디아서 1:16-17).
광야는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한 곳이요, 사람이 없고 험한 가시밭이 있는 곳이다. 광야는 후회와 낙심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요하고 풍족한 곳에서보다는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땅 광야에서 소명을 주셔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다. 엘리야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도우심은 극단적인 절망의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은 예기치 않은 수단들(까마귀, 사르밧 과부, 천사 등)에 의해 제공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시련의 때를 이기게 해준다. 좌절에 빠진 엘리야가 그러했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점은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강성열 교수 smilenews@kakao.com